5월 첫 번째 수요일, the second letter from 윤혜 ✍️
인생의 큰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겪은 윤혜는
자신의 봄 이야기를
쇼송의 ‘시곡(Poème)’에 실어 보내는데.
🥀
안녕을 고해야 할 순간
인생의 중요한 일들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얼마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입국 직전 니콜라스(남편)의 할머니께서 하늘로 떠나셨죠. 비행기표를 바꾸어 가까스로 장례를 치르고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한국에서의 시간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었어요.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못다한 결혼 준비에 일찍 입국한 프랑스 손님들 가이드에, 입 안과 입술이 다 부르튼 채로 결혼식을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경사는 경사이니 결혼식은 행복했지요. 봄바람 흔들리는 천막 아래 니콜라스와 마주보던 순간은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두 분도 온 가족과 함께 축복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구독자 분들과 플레이리스트로 나눈 축하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겁니다.
프랑스에 돌아온 후로는 할머니의 유품 정리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평생 일한 돈으로 마련한 집이 있는데, 상속세가 커서 그곳을 빨리 팔아야 세금을 낼 수 있거든요. 한국에 가 있느라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했으니 이제 속도를 내야 해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모으고 가꿔온 꽃과 자수, 접시, 책, 조각들을 나누고, 담고, 청소합니다.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니콜라스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피난처와 같았습니다. 니콜라스의 부모님은 알콜 의존이 심했고 걸핏하면 부부싸움을 벌였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고성과 폭력, 난동, 술과 담배 냄새 같은 것들로 얼룩져 있어요.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섰고 아내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니콜라스가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니콜라스는 아버지와 의절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오갈 데 없는 니콜라스를 거둬 돌보셨습니다. 니콜라스는 지금도 가끔씩 “자신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이유는 할머니가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욱 저는 인생의 등대를 잃은 그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제게도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방인인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더듬더듬 느린 제 문장에 귀기울여 주셨죠. 신문에 한국 이야기가 나오면 꼭 스크랩하셨고, 한국을 다룬 방송도 시간을 기억해 챙겨 보셨습니다. 프랑스의 예술과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고요. 조부모와 보낸 시간이 길지 않았던 저는 할머니와 관계를 통해, 나이든 분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정리하고 있는 이 집은 니콜라스에게 자신의 기억 전부와도 같은 곳입니다. 이 공간에 안녕을 고해야 할 순간이 다가옵니다. 어제는 발코니에 있던 꽃들을 모두 저희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이사의 충격을 이기지 못한 제라늄이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는데 호경 선배와 비슷한 슬픈 마음이 듭니다. 꽃잎이 ‘지는’ 것이어서 그럴까요. 떨어지면 사라져버리는. 지난 편지에서 선배는 햇살과 꽃잎이 쏟아진다고 했죠. 어쩌면 쏟아지는 건, 우리가 통제할 수 없기에 더욱 힘든 게 아닐까요.
꽃잎은 졌지만 그 자리에는 새잎이 나겠지요. 니콜라스는 코마 상태에 빠진 할머니 앞에서 17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용서를 구하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셋이 함께 유품을 들추던 중에 에르네스트 쇼송의 ‘시곡(Poème)’ CD를 발견했습니다. 쇼송은 할머니의 결혼 전 성이기도 한데, 생전 가족들을 그리며 이 음악을 듣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레이몽드 쇼송을 기리며, 에르네스트 쇼송의 아름다운 시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할머니는 떠나셨지만 이제는 제가 니콜라스의 행복한 가정이 되어주고 싶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