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다섯째 수요일, the third letter from 호경 ✍️
먼 유럽 땅, 아시안이라는 클리셰를 깨려다
주저앉은 윤혜에게 보내는 호경의 답장
클리셰의 역할과 정의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더없이 멋진 크리스마스 음악을 띄우며
두 사람에게 이 곡을 보낼 생각에 들뜨네요. 쇤베르크의 ‘크리스마스 음악’을 반복 재생하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기 탓에 목이 버석버석하게 마르고 두 눈이 피로하지만, 그래도 작업실에 앉아 이렇게 말을 고르고 문장의 배열을 고민하고 음악을 선곡하는 이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같이 나누고 싶은 문장이 있어 이렇게 옮겨 적어요.
“우리 사회는 너무나도 복잡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순화하는 법들을 배우게 됩니다. 바로 클리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너무 많은 정보들은 복잡하고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클리셰를 이용하게 되고, 기존의 관념에 의지하게 됩니다. 예술가는 제게 그런 고정관념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현실은 다르다고 지적해 줍니다.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고, 그 현실의 복잡함을 직면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고정관념을 깨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해 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단순화된 삶에 있어서 어떤 균형추와도 같습니다.” (프리 레이선 「사회 안에서 예술의 역할」 중)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 의하면 클리셰의 정의와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아시아인의 클리셰를 깨려고 지나치게 애쓰며 산 것 같다고, 그렇게 얘기했죠. 삶의 목표 자체가 ‘클리셰를 깨는 일’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탈이 난 걸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목표일 수는 있겠죠. 나는 절대로 클리셰를 반복하는 예술 활동은 하지 않겠다, 이런 태도는 가능할 거예요. 이 두 가지를 윤혜 씨가 삶 속에서 분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타국에서의 삶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새로 정착한 윤혜 씨를 보며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우려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윤혜 씨는 아마 고국에서 걱정하고 있을 저 같은 주변 친구들에게 더없이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려는 노력 속에, 정말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만, 삶이란 늘 한쪽 면만 있지는 않으니 힘든 점을 내색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게요. 동시에 프랑스 문화 속에서 존재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도 있었을 테고요.
저는 윤혜 씨가 아무렇게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예쁘고 그럴듯한 표현으로 고쳐 쓸 수도 있지만, 정말로 아무렇게나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러하다’는 형용사는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어떤 상태나 조건에 놓여 있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최대한 편안한 방식으로 삶의 모든 순간을 마주하길 바랍니다. 대신 윤혜 씨가 하는 예술 활동들은 더 창조적이길, 전투적이기를 응원해요. 한국과 프랑스의 작품 속 클리셰들을 모두 깨부수며, 새로운 멋진 순간들을 만들어 내길 바랍니다.
저 또한 ‘엄마’라는 고정적인 모습을 벗어던지기 위해 애쓰는 시기를 보내고 있기는 해요. 아이 핑계로 일을 미루는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다, 아이를 낳더니 정말 변했네, 같은 말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거든요. 일할 때는 꽤 애를 쓰고 있긴 하지만 별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별수 없는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으로 음악을 고르고 글을 쓸 수 있음이 기쁘다고 믿고 있어요.
이 곡으로 두 사람의 겨울이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 오래 끌어안으며, 따뜻한 연말을 보내기를. 우리가 서로 온기를 나눌 수 있을 봄을 기다리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