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 수요일, the second letter from 혜선 ✍️
먼 유럽 땅, 아시안이라는 클리셰를 깨려다
주저앉은 윤혜에게 보내는
혜선의 위로 그리고 스트라빈스키
🕊
겨울 지나 봄이 오면
섣부른 위로를 해줄 바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나이가 들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 나에게 예상치 못한 슬픔을 털어놓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요. 뭔가 위로해주고 싶은데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그 사람이 더 생채기가 날까 봐요. 머릿속과 입술이 싱크가 맞지 않아서 발생하는 일이죠. 언젠가 큰 목표로 삼았던 일이 어그러진 적이 있었어요. 주변에서 많은 위로를 해주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며 "그동안 수고 많았다"라고 해준 한 사람의 말이 더 큰 위안이 되더군요. 그래서 사실 저는 지금 윤혜 씨를 그냥 꽉 안아주고 싶어요. 우리가 너무 멀리 있는 탓에 이렇게 편지로 마음을 전해야 하는 일이 조금은 서운합니다.
저는 남편에게 제 얘기를 되게 많이 해요. 특히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곤 하죠. 남편에게 윤혜 씨를 이렇게 설명했어요. 사랑스럽고 독특한 사람. 우리가 ‘객석’이란 회사에서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요. 윤혜 씨는 그 치열했던 임용 고시로 꿰찬 교직 자리를 내치고, 힘들기 짝이 없는 잡지사 기자로 입사했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며칠 밤을 뜬눈으로 보내며 지겨운 마감을 끝낸 날에는 윤혜 씨는 갑자기 쾅쾅거리는 음악 소리가 듣고 싶다며 클럽을 간다고 했죠.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연애 때문에 한창 힘들어하던 시기에 윤혜 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윤혜 씨는 나에게 “사랑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괜찮다”라고 얘기했어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윤혜 씨와 있을 때는 항상 많이 웃어요. 그런 윤혜 씨가 지구 반대편에서 홀로 아파하고 있었단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네요.
윤혜 씨는 흔히 말하는 고정관념을 깨려고 세상에 나온 사람 같았어요. 그냥 그게 윤혜 씨였죠. 그렇기 때문에 윤혜 씨가 프랑스에서 인종이라는 클리셰를 깨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 같습니다. 윤혜 씨의 편지를 읽으며 저는 신고전주의 음악이 떠올랐어요. 20세기에 들어서 혁신적인 음악 양식이 많이 나왔지만, 이와 반대로 전통을 수용하려는 경향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게 얼핏 보면 고전주의 모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고전 양식은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작곡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융합한 사뭇 다른 현대성을 가지고 있죠.
프랑스에서 사는 윤혜 씨는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초연 에피소드를 잘 알고 있겠죠? 올해가 ‘봄의 제전’이 초연된 지 딱 110년째 되는 해이더군요. 1913년 5월 29일, ‘봄의 제전’이 초연된 파리 샹젤리제 극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하네요. 기존 발레에 대한 클리셰를 파괴한 니진스키의 안무, 야릇하면서도 자극적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이에 더해 발레 뤼스의 감독인 디아길레프는 조명을 켰다 컸다 하면서 관객을 더 자극했다더군요. 누군가 이날을 두고 ‘화성의 시대’가 끝나고 ‘리듬의 시대’가 열렸다고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어요. 이처럼 무슨 혁신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스트라빈스키도 사실 신고전주의 작곡가로 분류가 됩니다. ‘불새’, ‘봄의 제전’과 같은 불협화음 작품을 쓴 것과 다르게 그는 ‘풀치넬라’라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작품을 내놓기도 했어요.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 작품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과거를 되돌아보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해주는 곡이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위대한 음악가 스트라빈스키도 사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늘 틀만 부수며 살겠어요. 클리셰로 숨어도 괜찮아요. 그 안에서도 윤혜 씨만의 고유한 색채는 찬란히 빛날 것이라 믿어요. 잔혹한 겨울이 지나면 늘 봄이 오죠. 내년 봄에는 윤혜 씨가 한국에 온다고 해서 얼마나 설레는지요. 그때 우리 만나면 이번엔 제가 그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줄게요. 늘 윤혜 씨가 저에게 그래줬으니까. 아마 호경 선배도 옆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또 다음 만남을 기약하겠죠. 여기 우리가 있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