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첫 번째 수요일, thefirst letter from 윤혜 ✍️
판에 박힌 행위를 뜻하는 프랑스 단어 클리셰(cliché).
먼 유럽 땅, 아시안이라는 클리셰를 깨려다 주저앉은 제가 묻습니다.
두 분은 삶의, 글의 클리셰를 피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
숨을 쉬고 싶어요
편지가 많이 늦었죠. 미안해요. 요며칠 조금… 힘든 시간을 보냈거든요. 실은 요즘 자주 숨쉬기가 힘들고 눈물이 나요. 어젠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눈물이 났어요. 남편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입을 틀어막았어요. 숨이 잘 안 쉬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었어요. 점점 얼굴이 마비되고 손발에 감각이 사라졌어요. 이대로는 화장실에 갇힐 것 같아 겨우 기어가 문을 두드렸어요. 남편이 놀라서 달려왔어요. 어차피 남편이 볼 거 차라리 엉엉 울었다면 나았을까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무서웠어요. 나 왜 이러지. 남편은 바닥에 쓰러진 저를 안고 돌아와 눕히곤 팔을 주무르며,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달라고 했어요. 안 움직이는 입으로 겨우 한 마디씩 이었어요.
프랑스에서 산 지 벌써 4년이 되어가요. 긍정적으로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는데 아닌 것 같아요. 늘 나를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 고독감,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장난, 이웃집의 뉘앙스, 프랑스어에 대한 부담, 그런 것들이 제 안에선 곪아가고 있었나 봐요.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니 굳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또 걱정할까 봐요. 무슨 일을 당할 때면 저는 당하는 만큼 나름 되갚으며 잘 이겨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되갚는다고 그런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어요. 그만큼 제 안에 아픔도 쌓이고 있었네요.
원래 이번 편지에선 클리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두 분에게 작가로서 진부한 표현을 피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는지 묻고 싶었죠. 클리셰(cliché)는 프랑스어로 인쇄판, 사진의 인화 전 원판이란 뜻인데요, 같은 사진을 찍어낸 듯한 행위까지 포함해요. 찰칵, click과 같은 개념. 그러니까 영화의 뻔한 전개나 글의 식상한 마무리 같은 것 외에도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 스테레오타입이 될 수도 있죠. 프랑스인인 남편도 보통 누군가 예상되는 행동을 할 때 이 표현을 쓴다고 했어요.
제 삶에 이런 고름이 터져버리고 나니 알게 됐어요. 제가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시안이라는 클리셰를 깨려던 노력에 지쳤다는 것을요.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레스토랑에서는 꼭 팁을 내고, 누가 뭘 물으면 적극적으로 대답하고. 제 눈은 초롱초롱했죠. 그러나 불특정다수에게 하는 일엔 큰 보상이 없어요. 아름답고 좋은 기억도 많지만 깊게 남는 건 아픈 반응이고요. 늘 잘하려다 내 자신이 무너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점차 먼저 인사하는 횟수가 줄고 무표정해지고 있어요. 경계하는 이방인이 되어가는 제 자신이 힘들어요.
잘 만든 영화나 책에서 갑자기 뻔한 진행이 나오면 이해가 안 되었는데요. 어쩌면 그들도 하나하나 잘해내기 벅차 쉬운 길로 도피한 걸까? 클리셰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에 하나의 숨통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클리셰를 벗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정작 제 삶은 클리셰로 숨고 있네요. 늘 가볍고도 희망찬 편지를 쓰자 다짐하지만 무겁게 끝나는 제 편지를 보면 그것이 저의 마음 상태인가 봐요. 그래도 물어봅니다. 두 분은 클리셰를 피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