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첫 번째 수요일, the third letter from 혜선 ✍️
각자 꿈꾸는 마스터피스가 무엇인지 묻는 호경의 편지에,
갓 태어난 아기와의 가슴 벅찬 순간,
천천히 쌓여가는 감정을 마주하며 보내는 혜선의 답장
🫧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워 담아
보글보글. 가만히 앉아서 분유 포트에 물이 끓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참 좋아요. 칭얼거리는 아이를 흔들의자에 눕혀 놓았어요. 아직 의자를 흔들진 못하고 자기 팔을 흔들며 노네요. 저러다 곧 잠들 거예요. 그러면 저는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밀린 글을 쓰죠.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면 세 시간 짧으면 삼십 분이에요. 그래서 하루에 계획했던 것들을 다 놓치기 마련이죠. 이 편지를 이틀이나 늦게 쓴 이유이기도 해요.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에는 좀 더 우아하게 육아를 할 줄 알았어요. 아이에게 조성진이 치는 쇼팽을 자장가로 들려주고, 아이가 잘 땐 드립 커피도 내려 마시고 그러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네요. 아이가 보채면 손에 잡히는 아무 장난감이나 들어 전원 버튼을 누르고 기계음 가득한 동요를 들려줘요. 아이가 잠들면 저는 거실에서 쪽잠을 자느라 바쁘죠.
오늘 수유를 하다가 문득 아이의 눈동자에 제가 가득 차 있는 걸 보았어요. 그 눈에 비친 제 몰골은 누추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 이 아이의 세상에는 온통 나로만 가득하구나 새삼 깨달았죠.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울컥함. 이렇게 아이를 돌보며 쌓여가는 감정들이 있어요. 단순히 사랑이라는 단어로만 정의하기에는 모자란, 가슴 벅찬 그런 감정들이죠.
‘나디아의 수요일’에서 지난 1년간 몇 편의 소설을 쓰면서 느꼈던 점은, 아직 제 감정이 다채롭지 않다는 거예요.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몇 번 쏟아내고 나니, 창작 욕구는 이내 소진되어 버렸죠. 소설을 쓰는 게 노곤해졌어요. 그렇게 쓴 글들은 영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누가 읽게 되는 게 되레 부끄럽기도 했고요. 소설가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단 하나의 마스터피스를 남기고 은둔 생활을 했잖아요.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조금은 짐작이 돼요.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하고 싶은 말이 다시 넘쳐날 때 글을 쓰고 싶다고. 그리고 그것이 제 처음이자 마지막 마스터피스가 되어도 좋겠다고.
주변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 또래 작가들을 볼 때마다 괜히 자격지심이 생기곤 했어요. 나도 서둘러 어떤 결과물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죠. 그게 제 마스터피스가 아니어도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천천히 나의 속도대로 걸어가고 싶네요. 그 대신 더 진솔하게 나를 응시하고, 주변을 살피고, 세상과 더 많이 교감할 거예요. 호경 선배가 얘기한 것처럼 마스터피스는 움직이는 무언가가 맞는 것 같아요. 스스로 마스터피스를 내놓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감격의 순간이 올 때, 두 분은 제 곁에 있어 주실 거죠? 혹여 제가 그 이후에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려도 말이에요.
잠들었던 아이가 다시 우네요. 서둘러 글을 마쳐야겠어요. 아이에게 달려가 꽉 안아줄 거예요. 그리고 그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에게 이리도 벅찬 마음을 주어 고맙다고, 사실 나에게 너보다 대단한 마스터피스는 없을 거라고 말할 거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