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곳에 도달하자 되레 머리가 맑아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청승맞은 여주인공 역할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한 달 전, 임신 30주 차에 들어서던 그때 갑자기 남편이 죽었다. 남편은 오페라 가수였다. 남부러울 것 없는 유학과 콩쿠르 경력이 있었지만, 해외에서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는 소수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국내로 돌아온 그는 내가 일하는 오페라단의 조역 가수로 종종 참여했다. 아주 작은 조연이지만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오페라단 홍보팀에서 일하던 나는 그와 짧은 연애를 했고, 아이가 생겼고, 결혼을 했다. 갑작스럽게 가장이 된 그는 고정적인 수익을 원했고, 내가 출산 휴가에 들어간 다음부터 밤마다 공연을 포기하고 대리운전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이 채 되기 전, 그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한번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새벽 2시, 대리운전을 하던 중 음주 운전 차량과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일어난 일이었다.
밤에는 친구들이 줄지어 연락이 왔고, 아침에는 가족들의 전화로 눈을 떠야만 했다. 그 친절은 오히려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모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6개월 만나고 결혼한 남편은,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8개월가량 뱃속에 품은 나의 아이의 존재감은 날로 갈수록 묵직해졌다. 슬픔을 그대로 느끼기엔 배가 너무 무거웠다.
나에게 필요한 건 계획이었다. 친정으로 다시 들어가 살림을 합치고, 아이를 낳자마자 복직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부모님 모두 은퇴한 공무원이어서 아이를 봐 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서울에서 40평대 자가 아파트에 사는 부모님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립 오페라 단체에서 일한 지 벌써 5년 차가 된 나의 호봉은 매년 조금씩 오르고 있었고, 주말까지 일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꽤 안정적인 직장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아이를 키우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마음이 울적할 땐,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모자람 없이 내가 잘 키울 테니, 걱정 말고 지켜보라고. 당신이 남기고 간 아이를 홀로 내버려 두진 않을 거라고. 먼저 간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스치면, 힘내라는 그의 응원 같아서 애써 웃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산 것이었고, 남은 인생 전부는 아이를 위해 살겠다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
임신을 하면 이전까진 감각할 수 없었던 불편한 것들이 여럿 생긴다. 예를 들어, 지하철 임산부 자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는 젊은 여성을 봤을 때 말이다. 힐끔힐끔 그 여성의 가방을 살폈다. 임산부 배지가 있나 없나 살피다 그것조차 짜증으로 번져서 그냥 관뒀다. 초기 임산부라 생각하면 그냥 마음 편할 일이었다.
오페라단 팀장에게 출산 후 바로 복직을 한다고 얘기하러 가는 길이었다. 남부터미널 역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앉아있던 그 여성이 재빠르게 뛰어나가는 뒷모습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여기서 내려야 한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 여성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인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배 밑에 손을 갖다 대니 꼬물거리는 아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올랐다. 깊게 호흡한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익숙하던 회사에 가는 길인데 오늘은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를 모두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두려웠던 것이다.
“우와. 인아 씨, 배 많이 나왔네!”
“저 막 뒤뚱뒤뚱 걷죠?”
팀장은 웃으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날개뼈를 살짝 쓰다듬는 손길에서 부드러운 위로의 힘이 묻어 나왔다. 그저 이 정도면 됐다. 입사 초기부터 5년간 봐왔던, 밤낮으로 함께 일한 팀장은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한결 마음이 편해져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
회의실에 들어가 약간 놀란 건, 바로 그 여성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 앞에 앉아 있던 그 여성 말이다.
*
“안녕하세요. 작곡가 박현정입니다.”
여성의 이름은 박현정이었다. 그가 건네는 명함을 바라봤다. 이내 시선을 올려 그와 지긋이 눈을 맞췄다. 눈을 살짝 피하는 걸 보니, 아까 지하철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팀장은 잠깐 볼일 좀 보고 오겠다면서, 둘이 인사를 나누고 있으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전 홍보팀 유인아 대리예요. 지금은 출산 휴가 중이고요.”
박현정은 내년 시즌, 기획 공연으로 올라가는 창작 오페라의 작곡을 맡은 모양이었다. 해외에서 이미 여러 오페라 프로덕션에 참여했던 그가 정식으로 국내 오페라에 데뷔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사전 미팅 때문에 오페라단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명함에 ‘작곡가, 극작가’라고 적힌 글자가 보였다.
“극작도 직접 하시나 보네요?”
“네. 사실 작곡보다 극작에 더 소질 있다는 해외 리뷰가 많았어요. 하하.”
“작품은 얼마나 완성됐나요?”
“아직 초기 단계죠. 스토리 라인 잡고 있어요. 지금까지 영어 대본만 써서, 한국어로 쓰려니 고민이 많네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외국 생활을 했거든요.”
“그러시군요. 주제는 정하셨어요?”
“요즘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유행이라면서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페미니즘을 유행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잠시 생각했다. 임산부를 앞에 두고 자는 척하는 여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역시나 괘씸했다. 괜히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아서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복직 시기는 출산 후 한 달 뒤가 좋으려나. 그래도 두 달 까지는 쉬어야 하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금은 잘 돌려받을 수 있겠지. 여러 걱정을 하다 보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그나저나 수혁이 와이프가 여기 오페라단 직원이라고 하던데…”
순간, 박현정의 입에서 남편의 이름이 나와 흠칫했다. 찌푸린 미간 그대로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가득 서린 호기심은 나의 착각이길 바랐다.
“테너 이수혁 씨요? 제 남편인데요.”
“네에?”
박현정이 들고 있던 커피잔이 흔들렸다. 그는 내 배를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더니 다시 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적극적인 고갯짓에 순간 어지러웠다. 아울러, 앞으로 일을 하면서 불현듯 저런 표정을 아주 많이 마주하게 될 거라는 끔찍한 예감이 들어 조금 울적했다.
*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친정으로 들어가는 날, 부모님과 친오빠, 새언니까지 총출동해 이삿짐 정리를 도와줬다. 대문짝만한 액자에 넣어둔 웨딩 사진은 과감히 버렸다. 보고 있으면 자꾸 속이 울렁거렸다. 바로 그날 밤, 사진작가에게 본식 사진을 고르라는 문자가 와서 마음이 쓰렸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 아빠를 궁금해하면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애써 사진을 골랐다. 아이의 태동은 날로 거세지고 있었다. 이사를 마치자마자 방에 아기 침대를 들여놨다. 아기가 쓰는 이불은 얇고 부드러웠다. 얼굴을 이불에 가져다 대니 벌써 아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뽀얀 냄새가 코끝을 적셨다.
부모님은 복직을 천천히 하라고 다독였지만, 출산 한 달 후 다시 회사에 돌아가는 걸로 팀장과 얘기를 마쳤다. 팀장은 나의 선택을 응원했고 모든 건 순조로웠다. 밤마다 아버지와 집 앞 공원을 산책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다. 아버지는 나의 씩씩한 정신력에 새삼 놀란 듯했고,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나의 부모와의 연대가 더 강해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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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세상에 나온 날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출산 예정일 2주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태어났다. 몸무게가 적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건강하게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조리원에서는 완모하기 좋은 가슴이라면서 모유 수유를 적극 권했다. 곧 복직을 앞둔 상황이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조리원을 퇴소하는 날, 시부모님이 찾아왔다. 시부모님은 아이를 끌어안고 많이 울었다. 내가 봐도, 긴 얼굴형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나의 아이는 남편을 꼭 닮아 있었다. 함께 울고 싶지 않아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으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 뚫어질 것처럼 아이를 바라봤다. 그럼 금방 괜찮아졌다. 고맙게도 잘 웃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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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정 작곡가가 미혼모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고 하네?”
복직 후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됐다.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기는 하루하루 살이 올랐고 집에는 웃음이 넘쳐났다. 아기가 막 걸어 다니기 시작할 무렵, 나는 과장으로 승진했다. 다음 시즌 준비로 바빠지는 연말, 팀장이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박현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미혼모요? 제가 자문이라도 해줘야 하나? 미혼은 아니지만.”
이제는 농담을 던질 수도 있는, 그런 상태라고 생각해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팀장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며 웃어넘겼다. 시즌 프로그램북을 슬슬 준비해야 하는 시기여서, 박현정에게 전화해서 시놉시스라도 받겠다고 팀장에게 말했다. 박현정의 오페라는 연말에 올라가는 공연이어서 시간적 여유는 있었지만, 곧 있을 오페라단 기자간담회 전까지 다음 1년치 프로그램을 모두 정리해야 했다. 사무실에 들어가 오래전 받은 박현정의 명함을 찾았다.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려다가 어딘가 망설여져서 사무실 전화로 그의 번호를 눌렀다.
-“박현정입니다.”
“작곡가 님, 안녕하세요. 오페라단 홍보팀 유인아입니다. 지난번에 인사드린 적 있는데…”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복직하셨네요!”
“네. 아이 잘 낳고 복직하였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내년 시즌 북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대략적인 작품 시놉시스를 요청하려고요. 주제는 정하신 것 같던데요.”
-“아… 혹시 언제까지 보내야 하나요?”
“이번 주까지 보내주시면 좋습니다. 내용에 맞춰서 일러스트 작업도 좀 해야 해서요.”
-“저, 혹시 실례가 아니면 제가 사무실로 한번 찾아봬도 될까요?”
“네?”
-“오페라 대본 관련해서 자료 조사 중인데… 잘 안 풀려서 답답하네요.”
설마 아까 팀장에게 한 말이 작은 씨가 된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찾아왔다. 마음에 기묘한 무게감이 실렸다. 내키진 않았지만 그에게 알겠다고 했다.
*
박현정은 그 사이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정말로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사무실 앞 작은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사무실에서 하기엔 곤란한 말을 그가 꺼내게 할 것 같아서, 일부로 밖에서 보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뭐가 그리 급한 지 그는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 전에 본론부터 말을 시작했다.
“제가 지난 반년 동안 정부에서 지원하는 미혼모 센터를 다 돌아다녀 봤거든요.”
“그러셨나요?”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 미혼모 센터에 계신 분들은 조금 다 우울감이 깊더라고요.”
“아…”
“저는 조금 씩씩한 여성을 그리고 싶어요. 우리나라에 나혜석이나 박남옥 같은 여성들이요.”
“그럼 그분들의 이야기를 오페라화시켜 보면 어때요?”
“제가 역사극이나 시대극에는 영 소질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분위기가 또 그쪽으로 갈까 봐…”
갑자기 진동벨이 울려 자리에서 잠시 일어났다. 픽업대로 가는 순간, 카페 문을 확 열고 나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큰 이슈 없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 게 내 목표였다. 어린이집에서 재밌게 놀고 있을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조금 더 프로페셔널하게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이는 욱하는 마음을 참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였다. 아이 때문에 나는 인내심이 강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수혁이도 생강차를 좋아했는데.”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온 세상에서 박현정이 유일할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회사 직원들도 함부로 꺼내지 못하는 그 이름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입에 올리는 사람이었다.
“제가 수혁이와 이탈리아에서 대학 생활을 같이 했잖아요. 그때 걔가 생강차를 들고 다니며 마시더라고요. 할배라고 놀리곤 했는데, 인아 씨도 생강차를 좋아하네요.”
“아, 남편 얘기는 좀…”
“안 그래도 오늘 인아 씨 만난다고 해서 제가 사진 좀 몇 장 챙겨왔어요!”
박현정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앨범을 꺼냈다. 앨범을 넘기니 이탈리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남편의 사진이 몇 장 보였다. 오페라 의상을 입고 노래하는 남편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니 갑자기 코끝이 시려 왔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에게 달려가 꽉 안아 주고 싶었다.
“수혁이가 우리 학교에서 늘 장학금 받았던 거 아세요? 정기 연주회 때는 늘 선배들이 주역을 꿰차는데, 이때는 수혁이가 신입생인데 ‘라 보엠’ 주역을 맡아서 난리가 났어요. 수혁이가 노래를 참 잘하고, 무대에만 서면 정말 행복해했는데…”
남편이 죽은 후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면 고개를 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개를 들 시간도 없이 눈가가 젖어 왔다. 갑자기 쏟아져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노래만 부르던 사람이, 나를 위해, 아이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그것이 과연 목숨을 걸 대가가 있었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나를 감쌌다. 무대에서 노래하던 그가 너무 보고 싶어 숨이 막혔다. 사고가 나던 그날 밤 10시, 대리운전을 나가던 내려앉은 그 어깨를 사실 나는 모른 척했다. 유독 지쳐 보였던 그의 뒷모습이 목끝에 차올랐다.
*
내가 울자, 박현정은 따라 울었다. 그 연대감 때문인지 나는 그가 2주에 한 번씩 만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에 알겠다고 해 버렸다. 박현정과의 만남은 생각보다 편했다. 그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나에게 불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젊은 시절 에피소드를 유쾌한 언변으로 이야기해 주면, 나는 목청껏 웃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이야기를 유일하게 나눌 수 있는 그와의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작업은 잘 되어 가요? 제가 많은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글은 좀 쓰셨는지 궁금하네요.”
“그럼요. 인아 씨를 만난 다음부터 글이 잘 써져요. 마음이 뭔가 편해져서 그런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저도 현정 씨와 이야기한 후부터 조금 더 활력이 생겨요. 몰랐던 남편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게 재밌네요.”
“수혁이는 대학 때 연애도 안 하고 매일 연습실에만 박혀 있었어요. 얼굴은 잘 생겨서 인기는 많았죠. 누구와 연애하려나 늘 궁금했는데, 한국 들어오자마자 결혼한다고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우리가 짧지만 되게 뜨겁게 연애했거든요. 작은 역할도 땀 흘리면서 노래하는 수혁 씨의 모습에 제가 먼저 반해서 고백한 거예요.”
“제가 너무 빨리 결혼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수혁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정말요?”
짧게 스쳐 지나갔던,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 삶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박현정과의 만남을 오래도록 지속해야만 했다.
“시놉시스는 우선 메일로 보냈어요. 짧기도 하고, 내용도 좀 바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큰 틀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아, 수고하셨어요.”
*
짧게 정리된 시놉시스는 재밌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전복시킨 이야기였다. 박현정이 참여하는 이번 신작 오페라 역시 크리스마스 시즌에 올라가는 내용이어서 소재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여주인공 미미가 죽는다는 원작의 내용을 뒤바꿔, 남주인공 로돌포가 죽고, 그의 아이를 밴 미미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현대로 가져온 시대 배경 설정도 자연스러웠다.
극본이 완성된 이후 박현정은 분주해졌다. 그는 빠르게 작곡까지 마친 후 무대를 구체화시키면서 제작진과의 미팅을 늘려갔다. 나 역시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가 어려워졌다. 한 번은 사무실 엘리베이터에서 그와 마주쳤다. 몇 달 전만 해도 즐겁게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업무상 필요한 인사치레를 몇 마디 나눈 후 우린 뒤돌아 걸었다. 그리고 연말이 되도록 그를 볼 수 없었다.
*
“2시에 박현정 씨 신작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 있는데 보러 갈래?”
지난 공연 홍보 예산을 정리하던 중 팀장이 말을 건넸다. 시계를 보니 1시 50분이었다.
“그러면 지금 움직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 가 보자.”
의자 뒤에 걸어 둔 코트를 입고 옆 건물의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매서운 바람이 살결에 닿았다. 오늘 아침, 어린이집에 데려다 줄 때 아이의 옷차림을 생각했다. 아이가 신고 있던 레깅스가 얇았던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극장으로 넘어가는 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하원할 때 두꺼운 레깅스를 챙겨서 가 달라고 당부를 했다. 극장에 들어오니 로비에 벌써 신작 오페라의 포토월이 설치되어 있었다. 천장에 달려있는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잘 어울렸다. 오페라단 예산이 많이 투입된 이번 시즌 마지막 공연이었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국내 스타 오페라 가수들이 대거 출연하며 일찌감치 티켓이 매진된 상황이었다. 공연은 내일부터 3일간 이어질 예정이었다. 홀에 들어가니 웅장한 세트 규모에 살짝 놀랐다. 옆에 있던 팀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기획팀에서 남은 예산 다 쏟아부었나 보네.”
“그러게요. 창작 오페라치곤 규모가 어마어마하네요.”
나와 팀장은 객석 끝자리에 조용히 앉아 리허설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시인 로돌포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임신한 아내 미미를 위해 궂은일을 시작한 그 예술가는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숨을 거두기 전 혼신의 힘을 다해 아리아를 열창하는 로돌포는 미미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후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미미는 출산 후 아이를 들쳐업고 다시 촬영 현장으로 복귀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발표한 영화 입봉작이 큰 성공을 거두고, 미미는 영화의 주역 배우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그렇게 오페라가 끝이 났다. 뮤지컬이 떠오르듯 화려하고 선율적인 아리아들은 귀를 사로잡기 충분했고, 영상을 활용한 무대 구성은 세련미가 가득했다.
“인아 씨…”
옆자리에 앉은 팀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역시 어안이 벙벙한 건 마찬가지였다. 오페라 속 이야기의 주된 골자는 나에게서 끌어온 것이었다. 거기에 박현정이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하게 섞인 내용이었다. 팀장도 쉬이 눈치챈 듯했다. 가수들의 대사에서 내가 직접 표현했던 단어들도 몇몇 섞여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이 저릿했다.
“내가 풀 대본을 보지를 못해서… 이런 내용일 거라곤…”
팀장은 떨리는 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막이 내린 무대 위를 활보하며 주역 가수들과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박현정을 바라봤다. 그는 좋아 보였다.
*
며칠째 두통에 시달려 잠을 잘 수 없었다. 가장 바쁜 공연 시기에 나는 3일간 휴가를 냈다. 홍보팀 후배가 우리 팀장이 기획팀에게 달려가 내용에 대한 컴플레인을 했다고 전해 줬다. 단장까지 나서서 중재를 하는 상황이 왔고, 모두가 우리 팀장에게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을 하냐고 나무랐다고 했다. 직원들 모두 박현정의 오페라를 보며, 홍보팀의 유인아를 떠올렸던 건 분명했다. 언론에서는 호평 리뷰가 계속 터져 나왔다. 공연이 끝난 후 진행한 박현정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었다.
-도입 부분부터 로돌포의 강렬한 아리아가 몰임감을 유발한다. 로돌포는 미미와의 사랑을 결국 후회하는 건가?
로돌포는 유망한 시인이었다. 그에게 사랑은 부차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꿈을 향해 달려가는 미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미미는 로돌포처럼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로돌포와 달리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나와 다시 연애에 빠져드는 설정도 그래서 집어넣은 것이다.
긴 인터뷰에서의 이 두 언급만 봐도, 그동안 박현정이 나와 남편을 어떤 시선으로 봐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제는 한 살이 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와 내 품에 안겼다. 나의 모든 시름을 무색하게 만드는 작은 존재. 네가 나중에 커 이 오페라를 보게 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맑아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지의 순간이었다. 동종 업계 사람들과 문화부 기자들이 다수 팔로우 한 트위터 계정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앞으로 예상한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꺼이 그 길을 걷기로 했다. 그날 밤, 드디어 지독했던 두통이 사라지고 아이의 냄새를 맡으며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