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계의 성 차별에 대해서라면, 저는 불평할 것이 없어요. 저보다는 마린 올솝이나 조안 팔레타, 로랑스 에킬베, 나탈리 슈투츠만에게 물어보셔야 할 것 같네요. 저보다 먼저 등장해 진정으로 여성 지휘자의 지위를 끌어올린 훌륭한 분들이니까요.”
영화 <타르>의 첫 장면.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설정된 리디아 타르가 ‘뉴욕 타임스’ 기자의 음악계 성차별 관련 질문에 답할 때였죠. 언급된 지휘자는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마린 올솝(Marin Alsop, 1956~ ), 조안 팔레타(JoAnn Falletta, 1954~ ), 로랑스 에킬베(Laurence Equilbey, 1962~ ), 나탈리 슈튀츠망(Nathalie Stutzmann, 1965~ ). 모두 199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죠. 타르의 말처럼, 지휘가 남성의 전유물인 시대에 그야말로 ‘등장’한 셈입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로랑스 에퀼베의 이름이 귀에 들어왔어요. 미국과 강한 접점이 있는 나머지 지휘자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지금도 같은 악단을 이끌며 프랑스 지휘계 ‘대모’ 느낌을 풍기는 독특한 위상 때문입니다.
로랑스 에킬베는 1991년 29세의 나이로 합창단 악상투스(Accentus)의 지휘자로 데뷔했어요. 프랑스에 없던 여성 지휘자의 개념을 선구적으로 정착시켰죠. 이후 30년간 행보를 보면, ‘여성 지휘자’로 주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지휘자’로서 프랑스 음악계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2년에는 시대악기 연주단체인 인술라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2019년에는 문화부와 함께 국립성악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죠. 현재는 프랑스에 부재한 합창연구, 시대악기연구 시스템을 디지털로 개설해 운영해요. 각국의 시대악기 연주단체와 협력하는 공유 플랫폼도 출범했고요. 또 파리 음악원에서 젊은 성악가를 양성하고 있으며, 예술 행정적으로도 프랑스 문화부와 공연장 자문으로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역할이죠?
의욕 가득했던 에킬베는 30년간 프랑스 음악계가 여성 지휘자에 대해 가진 의구심이 틀렸음을 증명해 나갔죠. 왜인지 모르게, 프랑스는 다른 나라에 비해 여성 지휘자의 활동 반경이 굉장히 좁은 편이거든요. 에킬베는 역시 “여성 지휘자를 뽑는 콩쿠르인 파리의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나 필하모니 드 파리에 점점 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초청되고 있어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아직 유리천장이 깨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어요. “현재 프랑스 악단의 여성 지휘자 비율은 6%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992년 조안 팔레타가 버지니아 심포니 상임에, 2007년 마린 올솝이 볼티모어 심포니에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많은 국공립 오케스트라가 여성 지휘자들의 데뷔 발판이 되었던 미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지금까지도 주요 국공립 오케스트라에 여성 상임지휘자가 임명된 적이 없어요. 그럼, 여성이 지휘하고 싶다면요? 악단을 창단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 시작이 로랑스 에킬베와 악상투스였죠. <타르>에서 에킬베의 이름을 듣고 놀랐어요. 마침 인물사전의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그를 선정했던 참이었거든요. 3월 에킬베가 창단한 ‘악상투스’가 30주년을 맞은 기념으로요.
로랑스 에킬베는 소르본 대학에서 음악사와 음악 이론, 관현악 지휘를 공부했어요.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가 지휘자 니콜라스 아르농쿠르의 가르침을 받았고, 한편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죠. 에킬베는 합창단을 통해 슈트라우스나 쇤베르크, 풀랑 등이 작곡한 근대 합창 작품들에 빠져들었어요. 그런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80년대 후반, 프랑스에는 이러한 작품을 연주할 수 있는 전문 합창단이 없었죠. 합창 공연을 티켓을 사서 본다는 문화조차 전무했던 때입니다. 그때까지 합창단의 이미지는 지역의 아마추어 단체나 파리의 성당에나 있는 것이었거든요. 에킬베는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합창단을 직접 창단합니다. 1991년, 파리 5구의 지하실에서 악상투스가 탄생했죠. 초창기 멤버들은 전문 합창 문화를 알리기 위해 업계와 청중, 지역 관계자를 설득해 가며 고군분투했습니다.
에킬베와 악상투스는 프랑스에 합창 작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략을 짰습니다. 빠른 속도로 다양한 레퍼토리의 음반을 발매한 것이죠. 지난 30년간 무려 40장 이상의 음반을 냈답니다! 이런 전략은 악상투스의 존재를 알리는 데도 큰 역할을 했죠. 초창기 녹음 중 하나인 풀랑의 종교음악 음반 ‘Sacré’(1997)는 20세기 초 프랑스 합창 해석의 레퍼런스가 되었어요. 다양한 작곡가의 관현악 작품을 아카펠라로 편곡한 ‘트랜스크립션’으로 전문 합창단으로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죠.
현대 합창 작품 보급도 빼놓을 수 없어요. 악상투스의 등장은 프랑스 현대 음악가들에게 구세주였죠. 성악 작품을 작곡하고 싶은데 연주를 맡길 합창단이 없어 망설이던 이들이 악상투스를 믿고 새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으로 현대 작곡가 파스칼 뒤사팽(Pascal Dusapin, 1955~ ), 필리프 마누리(Philippe Manoury, 1952~ ), 브루노 만토바니(Bruno Mantovani, 1974~ )가 있죠. 프랑스 현대 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들입니다. 현대 합창 작업은 에킬베 스스로도 굉장히 뿌듯해 하는 작업인데요, 합창 음악이 사랑을 받으려면 고전과 현대 작품 둘 다 “헌신적으로” “기록해 나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여러 공연장과 지자체가 악상투스의 성공적인 운영을 눈여겨 보았어요. 그 결과 오베르뉴론알프 지역의 스피리토(Spirito), 옥시타니 지역의 레 젤레망(Les Elements), 마르세유 지역의 뮈지카트레즈(Musicatreize) 등을 비롯해 전국에 전문 합창단이 생겨났죠. 모두 지역을 대표하며 재정 지원을 받는 전문 합창단입니다. 악상투스가 초창기 노르망디 지역의 후원을 통해 자리를 잡고, 시테 드 라 뮈지크, 오페라 코미크 등에 상주하며 성장한 것을 선례로 삼았죠. 악상투스 30년 후, 전문 합창단 문화가 프랑스에 스며들었어요. 이제는 합창 공연에 티켓을 사야 한다고 설득할 필요가 없죠.
프랑스 음악계에 등장한 첫 여성 지휘자 중 한 명으로서, 또 첫 전문합창단의 지휘자로서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들. 직접 일군 단체들, 성사시킨 공공 기관과 프로젝트들.. 누구보다 앞서 많은 것을 창조하고 이끌어온 그는 이제 쌓아온 경험을 나누는 데 열정을 다하고 있어요. 그동안 어렵게 얻어온 것들을 흔쾌히 내어놓는 태도 또한 쿨합니다. 덕분에 현 세대의 여성 지휘자들은 에킬베가 먼저 닦아놓은 길에, 그가 축적한 귀한 자료들로 한걸음 더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앞사람이 잘하면 뒷사람이 보는 혜택. 그런 의미에서 리디아 타르도 에킬베의 이름을 언급한 걸 겁니다. 앞으로도 그와 같이 멋진 여성 지휘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윤혜
에킬베 지휘, 루이즈 파랑(Louise Farrenc, 1804~1875) 교향곡 1번 1악장